20110906

A_클렌체와 길리

오늘은 저번에 이어서 클렌체의 건축에서 나타나는 모뉴멘탈함과 신화적 상상력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클렌체의 스승이자 쉰켈의 스승이고 독일 고전주의의 대표 건축가인 길리를 간단하게 살펴볼 건데요. 어찌됐건 클렌체의 건축이 뒤랑과 길리, 이 2명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듯 하니까요.

Friedrich Gilly(1772 -1800)는 29살의 젋은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나 많은 작업을 남기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베를린 Brandenburg Tor를 설계한 Carl Gotthard Langhans(1732-1808)와 더불어 독일 고전주의 건축의 선구자 중에 한 명입니다. 쉰켈과 클렌체가 그의 밑에서 수학을 했고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신고전주의 건축가들 중 전통적인 규율과 질서에서 벗어난 독창적인 스타일을 추구해 프랑스의 르두, 불레와 같이 혁신적 고전주의 혹은 Revolutionsarchitektur 그룹으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Entwurf zu einem Denkmal Friedrichs des Grossen 1797

위의 그림은 길리가 계획안 프리드리히 대왕 기념비인데요. 이 계획안을 접하고 쉰켈과 클렌체 모두 너무나 큰 영감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얼핏 보면 마치 파르테논 신전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되는데요. 평탄한 지형 내에서 Parthenon 신전과 같은 모뉴멘탈함을 얻어 내기 위해 거대한 인공적인 건물로 기단부분을 조성하고 그 위에 도리스식 사원을 올려놓은 혁신적인 계획안입니다. 길리는 아테네의 Parthenon의 예 처럼 도리스식 사원이야 말로 시간을 초월한 최고의 건축이라 생각했고 그런 생각은 클렌체에게도 영향을 끼칩니다.


















 Walhalla. Donaustauf. 1900년 경 모습.

레겐스부룩 근방의 도나우 강가 언덕에 위치한 발할라입니다. 게르만 민족 신화에 나오는 전쟁영웅들이 살았던 도시이름 Walhall에서 따온 명칭인데요. 유럽전역에서 맹위를 떨치던 나폴레옹의 실각 후 바이에른의 루두비히 1세는 자기의 세력을 강하게 규합해 나가려는 움직임을 보입니다. 그 과정에서 공유할 수 있는 민족적 정체성을 과거 게르만 민족에서 찾으면서 하나의 상징물로서 발할라를 계획하게 됩니다. 1814년에 처음으로 아이디어 설계경기가 시작되었는데요. 처음에 루두비히는 영국식 정원 안의 고전주의 양식의 건물을 생각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그것이 너무 작은 것을 인식하게 되었고 다시 그 건축이 놓일 적합한 장소를 물색하던 중 클렌체와 함께 레겐스부르그 근방 도나우 강가 언덕을 선택하게 됩니다. 1830년 기초석을 놓는 것을 시작으로 1842년에 완공이 되는데요. 지형적인 차이를 제외하고 길리가 계획했던 안과 여러 면에서 겹쳐 보입니다. 길리가 완성하고자 했던 파르테논에서 나타나는 모뉴멘탈함을 결국 클렌체는 그의 작업을 통해서 실현합니다.

발할라 말고 클렌체의 작품 중 모뉴멘탈함이 잘 드러나는 작품을 꼽으라면 Kelheim에 위치한 Befreiungshalle를 들 수 있겠는데요. 1813-1815년 사이에 나폴레옹에 대항해 싸웠던 해방전쟁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관이 되겠습니다.  원통형의 외관을 가지고 있는 이 건물은 겉으로 보기엔 평범해 보이지만 내부 공간은 정말 놀라운데요. 쿠펠형식의 지붕과 그 지붕을 떠 받치고 있는 원형회랑의 공간 그리고 천사의 조각상으로 둘러 쌓인 거대한 홀. 그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3단으로 구성된 내부공간에 매력적으로 압도당하게 됩니다.















Bavaria und Theresienwiese. München / Rudolf Epp

독일의 사실주의 화가Rudolf Epp가 그린 바바리아와 테레지안비제입니다. 테레지안비제는 매년 뮌헨에서 옥토버페스트가 열리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는데요. 옥토버페스트에 방문해 보신 분들은 클렌체의 Ruhmeshalle와 그 정면에 당당히 서 있는 바바리아를 얼핏이라도 본 기억이 나실겁니다. 한 손엔 월계관을 한 손엔 칼을 든 바바리아는 바이에른의 여성상징물이자 수호신으로서 만들어진 거대한 동상인데요. 그녀의 옆에는 항상 바이에른의 상징동물인 사자가 같이 합니다. 바바리아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전사 아마존을 모티브로 삼고 로도스 섬의 거상과 피디아스의 제우스상에서 영감을 받아 작업을 진행하다 아테네의 수호신인 아테나를 모방해서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클렌체의 건축에서 나타나는 모뉴멘탐함과 신화적 상상력은 결국 그 당시 게르만 민족을 하나로 묶으려는 정치적 목적과 강하게 결부되면서 커다란 성과를 이뤄내는데요. 효율성과 합목적성을 추구하는 근대적 사고방식과 신화적 상상력이 어우러진 모뉴멘탈함 혹은 낭만적인 고전을 추구하는 전근대적 사고방식 사이에서의 줄타기. 이것은 고전주의,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역사주의, 절충주의 그 이름이야 뭐가 되었든 그 당시 많은 건축가들이 가지는 공통적인 특징 아니겠습니까?

20110830

AT_클렌체 그리고 뒤랑

Ecole Poly technique의 초대교장을 역임했던 Jean-Nicolas-Louis Durand(1760-1834)은 클렌체의 건축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뒤랑은 프랑스 혁명의 정신으로부터 파생된 새로운 평등주의 건축의 기초를 세웠는데 그것은 합목적성과 효율성의 원칙에 따라 정립된 건축이었습니다. 공학적인 합리적 사고를 통한 설계의 경제성과 기능을 중요하게 여기며 설계와 건설에서의 효율성을 추구했는데요. 이러한 신념은 건축의 단순함 그것에 도달하기 위한 표준화의 개념에 도달하게 됩니다. 강의내용을 정리하여 출판한 Preçis des leçons d’architecture données à l'Ecole polytechnique (2 vol. )에 그의 합리주의적 건축관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Preçis des leçons d’architecture, Durand, 1802-1805

위의 그림들은 뒤랑에 의해 고안되고 발전된 설계시스템을 보여줍니다. 정방형 격자 위에 평, 입, 단면을 결정하고 두 개의 기둥 사이의 간격이 구조적인 척도의 기본이 됩니다. 이것은 이전까지의 고전주의 건축의 접근방법과는 다른 것이었는데요. 동일한 격자 위에서의 설계. 기능적 적합함과 구조적 효율성. 이 새로운 건축관에 클렌체는 많은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클렌체의 글립토텍과 알테 피나코텍의 평, 입면을 살펴보도록 하죠.






Proportionsanalyse der Glyptothek. Aufriss der Hauptfassade. München

















Proportionsanalyse der Glyptothek. Grundriss. München



글립토텍의 주입면도를 보면 기둥의 간격에 맞춰 하나의 작은 모듈이 형성되있고 이 작은 모듈 7개가 모여 큰 모듈을 형성합니다. 이 큰 3개의 모듈이 모여 전체 폭을 형성하는데 평면을 보면 커다란 3*3 모듈에 맟춰 설계가 이루어 졌음을 볼 수 있습니다. 중앙 입구부분을 통해 전시공간으로의 동선과 중정으로의 동선을 분리하고 건물의 기능에 맞게 한 방향 순환식으로 전시 공간을 배치 하였습니다. 외부로부터의 빛의 유입을 조절하기 위해 북쪽 벽을 제외한 외부의 벽에는 창을 두지 않고 중정쪽에 집중적으로 창을 배치하였습니다.







Proportionsanalyse der Alten Pinakothek. Grundriss. München.











Proportionsanalyse der Alten Pinakothek. Aufriss. München.


알테 피나코텍 계획 당시의 평면과 입면인데요. 지금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지금의 알테 피나코텍은 2차 세계대전 때 폭격에 의해 일부 파괴 되었던 것을 1952-1957년 사이 Hans Döllgast의 설계에 의해 재보수 공사를 한 것입니다.) 평면을 보면 기둥 사이의 간격이 작은 모듈을 형성하고 5개의 모듈이 큰 하나의 모듈을 형성합니다. 평면상에서 작은 5*3 모듈이 주 입구의 공간을 형성하고 그 옆으로 3*3 모듈의 부속공간이 붙습니다. 5개의 5*5 모듈은 주 전시공간을 형성합니다. 평면과 마찬가지로 입면 상에도 입구가 있는 중요부분은5*5 모듈로 크기를 설정했습니다. 남쪽면에는 창들과 함께 긴 복도가 위치되어있고 중앙 부분에는 메인 전시 공간들이 좌우 대칭으로 위치합니다. 북쪽으로는 기본모듈 크기의 부속 전시공간이 연결되어있습니다.

클렌체의 많은 작업들이 뒤랑의 격자설계시스템에 의해 이루어졌는데요. 위의 두 예만 보더라도 뒤랑이 주장했던 합목적성과 효율성의 원칙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재밌게 생각하는 것은 클렌체의 다른 몇 개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모뉴멘탈함과 신화적 상상력인데요. 예를 들자면 Regensburg의 Walhalla와 Kelheim의 Befreiungshalle입니다. 이것들은 다음에 이야기 나눠보도록 합시다.  

(위의 내용은 뮌헨의 노이에 피나코텍 건축박물관 관장으로 계시고 뮌헨 공대에서 건축이론을 가르치셨던 Winfried Nerdinger 교수의 수업내용과 그가 저술한 Leo von Klenze – Architekt zwischen Kunst und Hof 1784-1864에서 발췌했음을 밝힙니다.)

20110823

A_뮌헨의 클렌체

제가 지금 살고 있고 공부를 하고 있는 이 곳 München. 여러 이야기들 중에서 München의 대표적인 건축가인 Leo von Klenze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Leo von Klenze (1784-1864)


















Leo von Klenze(1784-1864, 이하 클렌체)는 Karl Friedrich Schinkel(1781-1841, 이하 쉰켈)과 더불어 신고전주의 시대 때의 대표적인 독일 건축가입니다. 쉰켈이 자신의 설계에 질문을 하고 해답을 찾으며 다양한 구조적인 방법을 고민했던 것에 반해 클렌체는 거의 60년 작업 동안 사회변혁의 시대 속 에서도 자신이 올바르다고 믿는 건축적 기본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이러한 작업 안에서의 통일성은 그의 건물들과 더불어 뮌헨이 명확한 인상을 가지도록 가능케 했는데요. 쉰켈의 건물이 없는 베를린을 생각하기 어렵듯이 바이에른의 궁정 건축가였던 클렌체의 건물이 없는 뮌헨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Königsplatz, Glyptothek, Pinakothek 등과 같이 그에 의해 계획되었던 광장들과 건물들은 지금까지도 뮌헨의 모습(Stadtbild)을 대표합니다.

클렌체는 1800년 베를린에서 건축공부를 시작했고 이 시기에 Friedrich Gilly(1772-1800)의 작업에 매료되었습니다. 그 당시 대부분의 건축가들이 그랬듯이 그 역시 고전건축에 매달렸고 팔라디오가 로마식 건축을 자신의 시대로 가지고 와 정제해 내어 풀어낸 것처럼 그리스식 건축을 자신의 시대의 자신만의 언어로 담아내고 싶어했습니다. 1803년 학업이 끝난 후 클렌체는 파리로 가게 되는데요. 거기서 Ecole Polytechnique의 Jean-Nicolas-Louis Durand(1760-1834)을 만나게 됩니다. 그에게로부터 많은 건축적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후에 그의 대표적인 작업들을 통해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카셀에서 나폴레옹의 형제인 제롬의 추천으로 첫 번째 일(Theater Napoleonshöhe)에 착수하지만 1813년 나폴레옹의 실각으로 그도 실업자가 됩니다. 새로운 일을 찾기 위해 빈으로 여행 중 중간정착지인 뮌헨에서 후에 그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해 주는 태자 루드비히 1세(Kronprinz Ludwig 1.)와 만나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고 1805년 파리에서 다시 만난 루드비히 1세는 그에게 Glyptothek 설계 경쟁에 Karl von Fischer(1782-1820), Karl Haller von Hallerstein과 함께 참여할 것을 권유합니다. 여기서 클렌체는 1등을 하고 그의 작업을 뮌헨에서 시작하게 됩니다. 그는 후에 바이에른의 궁정 건축가 자리까지 올라가게 되는데요. 당연한 얘기지만 예나 지금이나 역시 건축가는 좋은 건축주를 만나야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나 봅니다. 1864년 눈을 감기 전까지 그는 이 곳 뮌헨에서 수 많은 가치있는 작업들을 남기게 됩니다.

그럼 간단하게 클렌체의 작업들을 구경해보죠.

Koenigsplatz. München. 1925년 경 사진.












여기가 바로 쾨닉스플라츠인데요. 왼쪽에 보이는 중정이 있는 정방형건물이 글립토텍 되겠습니다. 사실 이 광장은 처음에 뮌헨의 또 다른 대표적인 건축가 칼 폰 피셔에 의해 계획되었습니다. 아테네의 아크로 폴리스로부터 공간개념을 따왔는데요. 클렌체가 글립토텍의 일을 따오면서 종합적인 광장 계획도 따라 넘어오게 되었답니다. 쾨닉스플라츠는 뮌헨에 있는 광장 중 제가 제일 좋아하는 광장인데요. 역사적으로나 건축적으로나 이야깃거리가 풍부해서 다음에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이야기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Glyptothek 뒤쪽 입면. München.








Glyptothek 계획안







Alte Pinakothek. München.



 Ruhmeshalle. München.
 








 


글립토텍은 현재 그리스, 로마식 조각들을 모아 놓은 안틱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고 알테 피나코텍은 중세부터 18세기 중반까지의 예술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건물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고전적인 느낌이 풍기면서도 각 구성요소는 장식이 최소화 되어 평면적이면서 육중한 모습으로 읽혀집니다. 간단하게 몇 개의 이미지로 클렌체의 작업을 보여드렸는데요. 서두에 밝혔듯이 클렌체는 에콜 폴리테크의 뒤랑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다음 번에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죠.